다양한 지식 이야기/성경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단어 ( 공의, 사랑)

낭만쭈니 2022. 5. 10.

출처- 펙셀

 

1.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  공의와 사랑을 포스팅하는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 포스팅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단어인 공의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법정에서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는 언행을 보면 피해자와 판사에게 감형, 용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구요. 그밖에 예외로 자기가 뭔 잘못했냐는 식으로 반성 안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하지만 대부분 용서를 요구하지만 공의를 생각하지 않는거 같습니다. 즉 '내가 받는 처벌이 적당한 것인가?' '내가 이런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대부분 자기 잘못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을겁니다. 그런데요.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이건 한 강의에서 들은 내용인데요.  자신의 잘못에는 벌을 적게 받거나 안 받기를 원하면서 즉 자신의 잘못에는 공정, 공의를 원하지 않고 사랑 자비를 요구하지만 타인의 잘못에는 공정, 공의를 요청하는 경향이 많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일종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셨거든요. 다만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니  살짝 각색해볼게요.  물론 이 일은  예시이나 현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한 아이가 있는데요. 어느날 나쁜 사람에게 오랜 시간 폭행과 성폭행을 당하고 입막음을 위해 죽임 당하고 시신은  불태워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혀  법정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요. 재판관은 피의자가 반성을 하고 있고  자기는 사랑이 많기에 이 범죄자를 용서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풀어주죠.

 

그런데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은요? 이들의 고통은 정당하게 해결되었나요? 아니면 재판관이 본인은 사랑이 많으니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에게도 범죄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판사가 대신 용서해주는게 옳은 일인가요?

 

강의자는 이 이야기에서  사랑은 있지만 공의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주변을 보면 개신교이나 천주교인에게서 공의를 중시하는 모습들은 보기 쉽지가 않습니다. 대부분 신의 사랑, 자비만 강조하며 보는 측면이 강하더라구요.  바로 이런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법들을 어기는 행위를 반복하는거 같습니다.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건 아래 글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성경에서 죄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오늘 포스팅은 죄란 무엇인가? 를 주제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죄를 주제로 선택하게 된 이유는 어떤 천주교인에게서 죄가 무엇인지 개념을 정확하게 잡지 못하고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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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에게는  공의 또한  사랑만큼  중요하다라는 설명을 해보려고 합니다. 

 

2. 하나님이 공의를 무시하면 생기는 일들

 

 

하나님의 세계(영적)에선 몇몇 세력이 존재합니다.  크게보면  하나는 하나님과 천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루시퍼와 타락한 천사들인데요. 루시퍼 세력이 왜  하늘에서 쫓겨났는지는 기독교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알고 계실겁니다. 

 

루시퍼가 하늘에서 쫓겨난 이유는 하나님에게 반역을 했기 때문이겠죠? 이는 법을 어긴 것과 동일해요.  루시퍼 즉 사단에게 유죄를 적용하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루시퍼가 저지른 죄는 현재까지도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했어요.

 

따라서 하나님이 위 판사처럼  공의를 무시하고  사랑을 더 우선시해서 죄를 저지른 자들을 쉽게 용서해준다면 루시퍼 세력에게 비난, 항의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판결의 공정성이 의심을 받게 된다는거죠. 이는 다윗의 범죄에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 한 말에서 드러납니다. 

 

"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였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엿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사무엘하 12장 )

 

여기에 또 다른 세력이 있습니다. 루시퍼의 세력에 속해 있으면서 사람들 중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죄를 저지르고 사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죠. 이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는 이런 판결(또는 벌) 을 받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이 공정하지 않게 쉽게 용서 받고 천국 가는걸 두고만 보지는 않겠지요?  따라서 이들도 여호와의 원수 세력에 속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세력입니다.  이 세력은 예수님을 제외한 다른 천사들과 또 다른 창조물들인데요.  이 세력들도  하나님의 공정하지 않은 판결을 봤을 때 의문을 가지겠죠?

 

즉, '하나님의 사랑이 많아서  용서해준다는 판결을 내리는건 좋은데 뭔가 이상하다? 피해자들은 저렇게 힘들고 심하게 고통을 받고 살았는데 가해자 혹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들은  저렇게 쉽게 용서를 받는게 맞는걸까?' 라는 의문이 들수가 있어요. 

 

마지막은 피해자들의 세력입니다. 피해자들은 당연히 복수를 대신 갚아달라고 요청을 하겠지요. 예수님은 타인의 잘못을 계속 용서해주라고 하셨으나 이게 참  쉬운게 아닙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랑을 용서해도 피해자의 현실은 바뀌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한 사례가 있는데요. 상대방의 욕심과 강요로 인해  한 사람은 미래를 잃었는데 강요를 한 상대방은 큰 타격 없이 오히려 결혼하고 재산을 더 불리며 잘 살더라구요.   이렇게 피해자는 온전히 그 피해 결과를 다 안고 살아야 하더라구요. 반면 피해를 준 사람은요?  돈이 많으면 돈을 조금 주고 합의하면 그만이거나  아니면 그냥 감옥가서  조그만 살다가 나오면 그만입니다. (한국 형량이 약하다는 기준..) 그리고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가서 잘 살면 그만인거죠. 

 

따라서 여러번 용서하는 것은  강요나 시켜서 해야하는게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의 본인 선택에 따라 달려있겠지요.  (저는 피해자의 용서가 개인적으로 이부분이 구원의 조건이 되느냐 마느냐는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부분을 해결하지 못해서 답을 명확히 정립 못했어요.)

 

위 내용들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공의를 무시한  사랑에 기초한 판결을 내리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루시퍼의 세력과 피해자들의 세력에게 불공정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세력에게는 하나님의 불공정을 보고 신의 판결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결과가 나올겁니다. 

 

이는 일상사례에서도 쉽게 확인 할 수 잇습니다. 국회의원의 아들 즉 정치인의 아들이 범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갔는데 아버지의 힘으로 자식의 형량을 가볍게해서  석방 시켜주려는 기미가 보면 국민들이 신랄하게 해당 정치인을 향해 비판과 비난을하죠? 비슷한 이치입니다.  다들 알고 잇는거죠. 이는 불공정하다. 불의하다라는 것을요.

 

다음은 잠깐 눈운동하면서 휴식하고 가보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아서 본인에게 관심이 있는 정보가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다음 내용은 아래에서 뵙겠습니다. 

 

 

3. 하나님이 공의를 중시한다는 증거

 

3.1. 예수님의 희생

 

성경의 모든 내용에서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죠. 저는 구약과 신약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셔야만 했던 이유, 예수의 초림과 재림을 이야기해준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나요? 물어봅시다. 그러면 대부분 기독교인들인 이렇게 대답할거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라고요.  즉, 하나님의 사랑 관점을 먼저 보는거죠. 

 

네... 이건  좋은 의미입니다. 사랑이 제일 좋죠. 하지만 사랑이란 단어에 가려져 있는 공의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걸 왜 못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르게 설명해볼게요.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왜 아끼는 예수를 보내셔야만 했을까?  차라리 예수님을 희생 안 시키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 죄와 악의 존재를 없애고 죽음을 없애고 사람들을 그냥 구원해주면 되잖아. 뭐하러 이런 어려운 길을 택한거지? '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음에 보내셔야만 했던 이유... 바로  하나님의 법의 불변성, 공정성 때문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는 죽음이었습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지구의 모든 생물들에게 죽음을 선고하셨죠. 

 

따라서 하나님의 법이 선고한 죽음에서 되돌릴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법을 제정한  하나님 자신의 희생( 또는 죽음)뿐이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 법은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그 해결도 하나님 스스로가 책임져야 했죠.  그 법이 죽음을 선고했으니 하나님도 자신이 만든 법에 똑같이 자신의 죽음을 지불해야했던겁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보내서 사람이 갚아야 하는 죽음이라는 그 값을 대신 치르게 한거죠.  이렇게 예수님의 희생으로  사람은 죽음 후에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부활과 구원입니다. 

 

위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법인 공의를( 예수의 희생)  통해서 사랑을 더욱 더 가치있게,  가볍지 않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만큼 높다라는 의미를 알려준거죠.

 

 

3.2. 다윗의 범죄

 

이전 포스팅에서도 알려드렸지만  구약에 다윗의 유명한 치부가 하나 있어요.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탐함으로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다윗이 한 행위가 그대로 돌려받게 했죠.  거기다가 다윗은  정치하는 자리에 있어 그책임이 막중했기에 원래는 다윗은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는데요.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셔서  죽음만 피하게 하는 대신  원수의 비방에 따라  원수가 비방이 그치게 할 수 있는 그만큼 다윗이 한 행위보다 더욱더 큰 고통을 허용하셨죠. 

 

그 고통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첫 아이의 죽음과  자기 딸이 자기 아들(?) 암논에게 성폭행 당한데다가  아들들 사이에 복수극이 발생,  왕자의 난인  아들 압살롬에게 왕 자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자신의 후궁들이 압살롬에게 백주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공개된 장소에서 성폭행 당하는 방식으로 다윗에게 돌아갔습니다.  물론 아들 압살롬은 결국 다윗의 부하에게 죽었죠..

 

이 다윗의 범죄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보다 우선될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다윗이 살 수 있었던 점도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겠죠?  이렇게 다윗의 범죄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는,  사랑과 공의가 서로 훼손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거 같습니다.

 

관련 내용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관심있으시면 참고해주세요.

 

(죄와 벌)(용서) 다윗의 범죄 그리고 하나님의 벌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된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죄와 벌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 사랑받는 자' 란 뜻입니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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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바울 (로마서)

 

지금까지는 위에서 법과 공의 그리고 그 벌을 설명해보았는데요. 여기는 신약의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율법과 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법과 죄, 공의, 벌은 서로 연결 되어 있거든요.  

 

(로마서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3:31)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할 수 있냐 아니다. 그럴수 없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 

 

(로마서 7:7~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로마서 7:12~13)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위 성경 구절을 보면 바울은 율법을 죄를 알게 해주는 것으로 보거나  의롭다고 하는 등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죄 안에 살 수 없다. 죄를 멀리해야 한다며 강조하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지요? 

 

이렇게 모두 정리해보면 공의는 하나님의 법과 관련이 있으며  죄는 그 법을 어김에서 발생하고 여기서 공의가 작용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정리하며..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께 용서 받기 위해 해야 할 공의의 절차가 있습니다. 

 

바로 죄에서 벗어나야하는 것. 즉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죽을때 까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을 말하죠. 이는 우리가 용서 받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에 반드시 지불해야하는 값입니다.

 

법원의 판결 과정을 비유해볼게요.  법원에서  범죄자에게  형량을 감면하거나 석방할 때 조건이 있다는거 누구나 다 알거에요.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생각도 있구요. 판사는 범죄자가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거라는 기대,  조건으로 석방해주잖아요.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앞으로 다시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이죠. (물론 사람이 받아야 하는 처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공의를 무시하고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사람들을 용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기로 선택하셔야만 했던 것,  다윗에게 사형 선고를 하지 않는 대신 다윗이 저지른 결과들을( 밧세바의 첫 자식의 죽음, 압살롬의 난)  책임지게 했던 것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만큼  공의도  동등하게 중요시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공의는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거 같습니다. 

 

만약에 모든 불의들에(누군가에게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인 면에서 피해를 받아 피해자가 생기는 일)  공의가 없으면?   사랑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죠?  또는 욕심과 관련해서 자기와 자기쪽에서만 사랑함으로 인해 피해자가 생기면  그건 이기적인 사랑이지. 다른 사람들과 피해자는 그 모습을 사랑이라고 생각 안 하겠죠? 거기에 공의가 없다고 생각하겠죠?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삶에서 사랑을 보면  공의를 생각해야하며,  공의를 보면  사랑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둘은  항상 같이 붙어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하며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저의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제 글 주변에 관심이 있는 정보가 있는지 한 번 살펴봐주세요. 그리고 관심이 가는 정보를 구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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